10년의 가까운 일본의 군사적 지배와 식민 정책에 맞서 1919년 3월 1일 대한민국 국민들은 정신력, 유대감, 투쟁 그리고 용기로 하나가 되어 그들의 자유, 자결권, 그리고 민족에 대한 고유 권리를 위해 싸웠습니다.
운명적인 오후 2시, 33 명의 민족 대표들은 얼마 전 파리 평화회의에서 수용된 민족 자결권(自決權)에 대해 서술 되어 있는 미국 윌슨 대통령의 ‘14 개조(Fourteen Points)가 바탕이 된 독립선언서를 낭독 하기 위해 모였습니다. 독립선언서는 1,500 개가 넘는 비폭력 평화 투쟁을 전국적으로 확산되게 하였으며 이 민중운동은 한국의 독립을 가져다 주지는 않았지만 민족의식을 높이는데 기폭제 역할을 하였으며 1919년 상하이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오늘 ‘3.1 절’은 한국의 독립을 위하여 독재를 향해 용감하게 맞선 200 만 명이 넘는 분들과 한국의 독립을 희망하며 목숨을 바친 수천명의 국민들을 기리는 날입니다.
3.1 운동은 많은 순국선열들과 영웅들을 만들어 내었습니다. 그 순국선열 중에 한 분이신 유관순 열사는 어린 고등학생 신분으로 고향인 천안에서 독립운동의 선봉자 역할을 하셨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4월 1일 아우내 장터에서 수천 명의 만세운동의 관중들을 용감하게 지위하셨습니다. 그녀의 부모님은 운동 당일 일본 헌병들이 쏜 총에 맞아 피살되셨습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는 동안에도 대한민국의 자유를 위해 싸우시며 1920년 3월 1일 독립만세운동을 전개하셨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고문으로 망가진 몸을 뒤로한 채 1920년 9월 28일 감옥 안에서 생을 마감하셨지만 그녀의 정신은 절대로 굴복되지 않았습니다. 유관순 열사는 한국의 독립운동의 상징이 되셨으며 지금의 한국인들의 긍지와 정신력의 원천이십니다.
독립운동 당시 캐나다 선교사, 수의사이자 학자인 프랭시스 (프랭크) 윌리엄 스코필드 박사는 대한민국 국민들을 지원하고 옆에서 함께 서있었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그의 독립 활동으로 잘 알려져 있으며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비판하였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본의 군사적 만행에 대해 확실한 증거를 제공하고 3.1 운동을 기록하며 세계의 관심을 이끄는 역할을 하였습니다.
스코필드 박사는 캐나다와 한국의 깊고도 지속되는 신의와 친선 관계의 상징이십니다. 한국은 그를 국가 영웅으로 기억하며 ‘34 번째 민족대표’라는 타이틀을 선사하였습니다. 외국인으로서는 유일하게 국립서울현충원에 안장되셨습니다.
한국전쟁 65 주년을 기념하고 1919년의 3월 1일 독립운동을 기리며 잠시 생각에 잠들며 자유는 자유롭게 이뤄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다시 한번 깨닫습니다.
연아마틴
야당 수석 부대표
의원 친선협회 연합 부의장
캐나다 한국 의원 친선협회 공동 의장
성 노예 피해자를 위한 국제의원연합 공동 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