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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자작나무 숲

글쓴이 : Reporter 날짜 : 2017-06-28 (수) 21:25 조회 : 20520
글주소 : http://cakonet.com/b/column-1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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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 김민식(캘거리 문협)

보름달이 아직도 중천에서 발그스레한 얼굴로 가로등 불빛과 어울리며 한적함을 달래는 상쾌한 밤이다. 다리를 건너자 인적이 고요한 대로변에 까치가 웅성거리고 있었다. 봄이 오면 한밤중에 어린 코요테들이 까치집을 습격을 하거나 까마귀와 집단적으로 영역싸움을 벌이느라 흥분한 까치들이 괴성을 지르며 대로변에 뛰쳐나와 정신없이 서성거리는 것을 몇 번 목격한 터라 천천히 운전을 하며 주위를 살핀다.

아뿔싸, 오른 쪽 언덕 숲이 발가벗긴 채 달빛에 오들거리고 있다.

길옆 언덕 위의 축구장보다 몇배는 큼직한 자작나무 태고의 숲이, 반나절 만에 사라진 것이다. 자기의 영역을 철저히 치키며 치열한 생존을 벌이는 까치들이, 삶의 터전을 졸지에 잃고 허탈에 빠져 안전한 길가로 피신을 한 것이다.

빨간 신호등에 차를 멈춘다. 오늘 따라 길 건너 언덕의 몸매 가냘픈 여인들이, 새로 입은 연초록 저고리가 오후의 햇살에 눈이 부시도록 아름답다. 이럴 때면 차를 돌려 숲으로 들어가 와락 껴안고 싶은 충동이 인다. 망설이다 다음을 기약하고 출근을 했는데 순식간에 사라진 일이라 애석하고 어안이 벙벙하다.

차로 1~2분, 마을을 빠져 나오면 이내 South West Fish Creek Boulevard 대로를 만나고, 바로 우회전 하면 37 Street가 시작되는데, 이곳의 왼쪽 낮은 언덕에 다소곳하게 자리 잡은 자작나무(aspen)포플러 작은 숲이 있다. 숲 언덕의 북쪽끝자락은 울창한 태고의 계곡을 따라 동서로 길게 이어지고, 계곡위로 4차선 다리가 남북을 잇는다. 숲의 서쪽 계곡은 비포장도로를 따라 숲이 10여 분 길게 이어지는데 숲이 끝나면 광활한 서티나 원주민(Tsuu T'Ina Indian Reserve 145) 땅이 끝없이 펼쳐진다. 잊히려야 잊힐 수 없는 정이 듬뿍 든 숲이다.

Image result for South West Fish Creek Boulevard birch

이 작은 숲과의 인연은 아주 오래고 깊다.

이민 다음 해 피자가게를 인수하고 막 여름이 시작되고 있었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부근에서 피자 배달 주문이 왔다. 가게를 인수하기 오래 전부터 배달 일을 하고 있던 배달원이 바쁜 시간이라 배달을 거부한다. 차를 세우고 한참을 걸어가야 한다는 것이다. 의욕과 열정이 넘치던 초창기 시절이라 내가 배달을 했다. 사라진 자작나무숲 길 건너 지금처럼 대규모 주택단지가 없었고 띄엄띄엄 옛집들과 사방이 울창한 숲이다. 콘크리트 다리는커녕 계곡의 샛길을 타고 내려가면 통나무 징검다리가 있었다. 난생 처음 매서운 겨울추위를 경험한 터라 살아남은 야생식물들이 대견스러워 보였다. 파인 트리 등 침엽수, 자작나무(아스펜 포플러) 활엽수가 함께하는 오솔길을 한참을 걸어 피자배달을 했다. 강풍을 만나면 부러질 것만 같은, 가냘픈 여인의 몸매처럼 늘씬한 키의 자작나무들이 마음에 들어, ‘언젠가 나도 이 근방으로 이사를 오리라’ 꿈을 꾸며 걷곤 했다. 태고의 원시림처럼 주위에 죽은 자작나무들이 사방에 즐비하다. 매우 큼직한 저택의 노인은 두툼한 배달 팁을 주곤 했는데 그 재미에 서너 번 배달을 하며 정이 담뿍 배인 숲길이다.

20여년 어간에 개발이 되고 주위에 신흥 주택들이 속속 들어섰다. 캘거리 링 로드(Calgary Ring Road) 마지막 남은 남단 끝자락 도로 연결 건설이다. 인디안 원주민들과 거대한 금전적 보상 합의를 이유로 자작나무 태고의 숲이 처참하게 파괴된 것이다. 그 자리에 27홀의 골프장과 상가, 학교가 들어선다고 한다. 토종 자작나무는 연약한 여인 같아서 트랙터로 밀면 순식간에 뿌리 채 뽑힐 것이고, 그 많은 나무들이 반나절 만에 말끔히 치워진 것이다.

나의 상상을 넘어서는 현대 문명의 횡포에 소름이 끼친다. 더 멀리, 더 이상 사람의 개발을 허용하지 않는 곳으로 도망가고 싶다.

자작나무 숲은 조림을 한 것보다 추운 지역, 아직 길도 나지 않은 다닥다닥 붙어있는 태고의 자작나무 숲을 걷는 것이 제 맛이다. 생성과 소멸을 쉽게 거듭한 탓인지, 죽은 나무들이 주변에 너절하고 어린 나무들이 쑥쑥 연신 잘도 성장을 한다. 물먹어 오래된 낙엽을 밟으면 발밑에서 철벅거리는 소리에 홀리고, 연신 온몸을 떨며 아름다운 소리로 수다를 떠는 몸매 날렵한 토박이 여인들을 만나는 즐거움을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이것을 경험하지 않은 감사의 묵상기도가 ‘참’ 일 수 있을까?

내가 틈만 나면 자작나무 숲을 찾아 묵상하는 것은, 미풍에도 몸을 떨고 춤을 추며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고, 요구하는 자연의 정신에 쉽게 순응하며, 추운 겨울과 강풍을 견디며, 오로지 하늘을 향해 몸을 쭉쭉 뻗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나, 자연과 나의 관계를 깊이 사유하며 내면을 다지는 순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지난 주말 가계 뒤뜰의 이태리 개량종 포플러 미루나무의 큰 가지들이 또 한 번 뚝뚝 부러져 나갔지만 자작나무는 연약해도 휘어질지언정 부러지지 않는다. 소멸을 딛고 선 인적이 드문 또 다른 자작나무 생성 숲을 찾아 나설 것이다. 올가을 이곳을 방문하는 초등학교 동창생 부부들과 새로 발견한 자작나무 숲을 몇 일간 산책하며 생성과 소멸의 원리를 곱씹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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