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입니다.
산불 매연 때문에 사방이 퀘퀘하고 을씨년스러워도 가을은 기어이 손끝으로 영글은 대지의 신호를 보내옵니다. 여름내내 사는 것 때문에 허우적거리다 나의 존재를 잊을 뻔 했습니다. 존재속에 깊이 감추어진 삶의 진리가 멀리 있는 것만 같아 이 가을 새벽에 다시 두손을 모았습니다.
찬기운이 내리면 정신이 번쩍드는 아침, 이 순간이 성스럽습니다.
이 가을에는 혹독한 연기가 나뭇잎의 숨구멍을 메워도 굴하지 않고 고운 단풍이 들기를 소원합니다. 경건한 마음의 여백위에 가족과 친지들, 소매끝을 스쳤던 분들의 안녕을 위한 기도에 눈시울이 붉어집니다.
“주님. 가시덤불같은 이 세상 길, 더 이상 갈수없는 막다른 길 끝에 한 참을 서 있습니다. 모든 것이 허무로 에워싼듯 삭막한 길 끝입니다. 모세가 이곳에서 주님을 만나듯이 나의 고귀한 신뢰의 믿음을, 이 허무한 세상을 이기고 남을 성스러운 마음으로 을 이 가을을 회복하게 하여 주소서”
지구는 지난 두 해 동안 단 하루도 COVID-19 역병 때문에 편안할 날이 없었습니다. 폭염 가뭄 태풍 홍수 지진 폭설 등 많은 재해들이 지구 곳곳을 번갈아 가며 위협했습니다. 인류가 지쳐서 술과 마약과 도박에 기대지않으면 삶의 낙이 없는 듯, 세상은 온통 혼돈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들고 헤어나올 줄 모릅니다.
그 낯섬의 두려운 일상 때문에 당황하며 힘들어 하다가 다섯번이나 응급실 신세를 졌습니다. 혈압때문에 응급실에서 하루밤을 지내야만 불안이 가시고 평온이 찾아오곤 했습니다.
이국땅 변방에 칩거하면서 차라리 눈과 귀를 막고 나의 울타리를 치고 지내면 그것이 편안하고 복된 삶 일것이라는 유혹과의 싸움이 역병을 견뎌내는 것 보다도 더 힘들때가 많았습니다.
이 순간에도 컴퓨터에서 자동적으로 배달되는 실시간 방송 신문 뉴스가 쏟아져 들어옵니다. 터키 독일 아프리카의 폭풍우 해일 폭설 소식을 급전하는가 하면 아이티 지진 사태로 1500 명 이상의 사망 보도가 잇달아 올라옵니다.
알버타에도 2014년 161건의 매독환자가 2020년에는 2,509건의 성병환자로 늘어나 지금 환자들을 추적 차단하기에 여념이 없다는 보도입니다.
세상의 종말이 온 듯 어수선하고 허무해집니다.
이 고요한 침묵의 순간에, 덤불 에워 쌓인 세속의 이 길 끝에서, 성스러운 음성이 들려옵니다.
허무한 막다른 골목이 있기에 절박한 성스러움의 희망이 있습니다.
성스러움은 혼돈의 시대를 중지시키고 놀라운 경이와 감사한 삶으로 가득차게 만드는 힘이 있습니다. 신비롭거나 억압적인 형태로 나타내는 것이 아닌 성스러움 그 자체로 족합니다. 어느 특정한 종교의 전유물이 아닙니다.
나의 의지나 힘만으로 거저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나의 인생이 막다른 골목에서 깊은 절망과 상처를 받았을때. 나의 고귀한 희생을 통해서만 얻어진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성스러움(sacred)과 희생(sacrifice)은 같은 공간의 시간성 위에서 공존합니다.
희생적으로 봉사하는 삶속에서 성스러움은 피어나며 향기를 발합니다.
얼마전 밴프에서 발행하는 BMO 인터넷 신문의 사설 제목입니다.
‘Compassion and understanding key to overcoming COVID’
코로나 시대를 지나면서 마음속 깊이 간직하며 힘들때마다 생각하며 실천에 옮기곤 합니다.
코로나 역병을 통해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이웃에 대한 사랑과 이해의 정신으로 더 한층 강화된 성스러운 생활 실천입니다. 이러한 생각들이 행동으로 옮겨지고 우리의 습관으로 굳어지면 백신보다도 더 강한 힘으로 세상을 이길 것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