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ast Christmas
라스트 크리스마스
아이 게이뷰 마이 허트….
이런 노래가 있었다.
굉장히 옛날 노래임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매년 크리스마스때면 어김없이 흘러나오는 노래 세월이 지나도 세련된 노래구성은 물론
잊혀지지 않는 목소리. 그가 바로 조지 마이클이다.
무수한 히트곡을
가진 그이지만 유독 언제나 크리스 마스 때면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라스트 크리스마스 노래. 모두다 너무 좋아했었다.
그 노래를 부른
장본인 조지 마이클이 정말 영화처럼 크리스마스날(2016년 12월25일) 숨을 거두었다.
예전에 가수인생은
노래제목 따라간다는 말도 있었는데 …나의 젊은 시절 추억의 일부분을 가지고 있던 그 였기에 기분이 묘했다.
고등학교 시절 학교
앞 떡볶이 집을 가도, 집 근처 경양식 집을 가도 언제나 흘러나오던 그의 노래 ..
데뷔와 활동
지난 2016년 12월25일 영국태생의 뛰어난 가수 조지 마이클이
세상을 떠났다.
조지 마이클 그는
1963년 6월25일생 올해53세 이다. 아직은 보여줄 것이 너무 많은 나이였다
데뷔는 솔로 가
아닌 Wham이라는 남성 듀오(1983)로 시작했다. 멤버는 앤드루 리즐리와 조지 마이클 이었다. Wham의 멤버로 1986년까지 6년간 활동했다. 그는 그룹 Wham의 프론트 맨으로 미안한 말이지만 앤드루 리즐리에게 눈길한번 안 갈 만큼 화면과 노래를 장악하고 있었다. 그때 그는 아이돌 스타 로써 자리매김한다. 앨범은 데뷔앨범 ‘Fantastic’
과 2집’Make it big’이 정말 빅
히트를 쳤다. 3집 앨범을 끝으로 Wham은 해체된다.
그 뒤 그는 솔로
로 활동도 이어갔다. 1987년 ‘Faith’라는 솔로 앨범이 나왔을
때 무려 2,500만장 이상을 판매 하며 그래미상등 그해 주요상을 석권한다. 사실 그는 노래 뿐 아니라 작사 작곡은 물론 베이스 기타 연주는 프로 뮤지션 레벨로 알려져 있다. 자기 앨범에 베이스는 그가 녹음한 것도 많다.
그 의 활동은 어느
시대에 관계없이 주목받고 히트곡이 나오고 언제나 팝의 중심에 서있었다. Wham시절 노래가 더 상큼 발랄했다는
의견과 더불어 솔로 시절은 좀더 선 굵은 노래를 보여주며 무게감 있는 월드 싱어로써 군림하게 된다.
그를 미국가수로
잘못 알고 있는 사람들도 많은데 그는 영국 가수이고 영국인이 사랑한 영국최고의 가수였다. 미국 쪽에서는 그를
블루 아이드 소울 이라고 해서 푸른눈(백인을 지칭)의 소울 싱어,
즉 백인 이면서도 흑인 만큼의 느낌이 있는 가수로 인정했었다.
순탄치 않았던 마지막길
월드스타 싱어로
승승장구 하던 그가 온갖 구설수와 법정시비로 에너지를 낭비하게 되었던 것.
이 이유 때문인지는
몰라도 어느 날 TV에서 모습을 한동안 볼 수 없었다.
그러다 한번씩 커다란
행사에 가끔 출연해서 한방씩 터트리고는 했는데 그때 마다 대박 언제나 건재함을 과시하기도 했다.
사실 그는 동성연애자이고
그것이 밝혀졌을 때 영국은 모르겠지만 한국의 팬들은 충격을 받은 것도 사실이었다.
그 뿐 아니라 마약을
복용한 사실과 화장실에서 외설적인 행동을 하다가 발각된 일등 사건 사고도 많았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이 그렇게
살짝 잊혀지는가 했다. 사망 직전에는 비만이 와서 외모를 알아볼 수 없는 지경까지 간 적도 있다고 한다.
더 슬픈 일은 재기를 위해 3년간 준비한 앨범이 나오기 직전에 사망하게 된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자신의 행보를 준비하고 있었나 보다. 알려진 대로라면 사인은 심부전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선행
그는 어린시절 가난하고
어렵게 살았다. 그러나 가수가 된 이후 거액의 재산을 소유한 부호가 되었다. 부호가 된 뒤 그는 자신의 재산을 어려운 사람들에게 나누어 주는 일에 최선을 다했다. 그는
오랜 기간 자선단체에 거액을 기부해 왔으며 노숙자 쉼터에서 남몰래 봉사활동도 해왔고 병으로 고생하는 사람들에게 치료비를 지원했던 사실도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본인이 절대로 자신의 선행을 공개하지 말라고 요청했고 그 약속은 지켜졌었다. 그리고 그가 사망한 이후 지금 에서야 알려지게 되었다.
그가 남긴 것
강렬한 인상을 주었던 앨범들, 무수한 루머와 사건 사고 , 언제나 그가 움직이면 이야기 거리가 무수하고 선행도 너무 많지만
그 무엇보다 그의 최고 선행은 나의 학창시절 추억의 한조각을 담당했던 노래 그 음악을 만들고 부르고 남기고 간 것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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