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 김민식 (캘거리 문협)
3월 둘째 주의 밤하늘이 너무 아름다워 가슴이 뛴다.
초순께를 벗어난 달은, 정오가 넘어 희미한 조각배로 동쪽 하늘애서 뱃놀이 하고 있었다. 한밤 중,어느새 서쪽하늘 끝에 걸려 마지막 노를 저어 가고 있다. 잔가지에 얼굴을 푹 묻은 백열등을 벗 삼은80년생 미루나무사이로, 두둥실 뱃놀이 하고 있다. 오늘따라 앙상한 가지 사이를 노니는 신비스러운 모습이 이토록 아름다울 수가 없다. 서쪽하늘 아래 오롯이 걸린 새털구름사이로 일렁이는 모습은 바라만 보아도 어느 새 눈물이 뺨에 아롱지는 멋진 밤이다.
심령이 가난한 자에게 내리시는 하늘의 은총이리라
영하 10도가 넘는 해맑은 밤, 남쪽 하늘의 별들이 총총해서 샛눈을 뜨고 관찰하면, 아주 매우 여린 은하수 띠가 잔잔히 흐른다. 이렇게 찬란한 밤이면 이따금 나는 가게 뒷마당의 미루나무를 꼭 껴안고 한 바퀴 빙그르 돈다. 콜크 수피 껍질은 언제나 포근하다. 아무도 보는 사람 없어 고요한 밤이라,귀를 하얀 수피에 바짝 대고 한참을 묵상한다. 수액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베토벤의 교향곡 9번 합창, 헤르만 헤세의 낭랑한 목소리, 예수의 산상수훈이 들려오고 우주의 소리가 들려온다.
지난 한 주, 시눅바람 덕분에 영상 10도를 감지한 겨울눈이, 부쩍 자라 잎을 터트릴 태세였는데 이번 주 되레 오므라들었다. 며칠사이 가지의 수분을 홀짝 빼버린 탓인지 그새 금방 앙상해 졌다. 자연에 발 빠르게 순응하고 변화하는 나무의 지혜로움, 캘거리 삼월에서나 맛 볼 수 있는 여린 즐거움이다.
먼발치의 하얀 잔설무덤이 눈에 익숙하다. 오늘은 그냥 지나칠 수가 없다. 가게 뒷문을 열면 ㄱ자 모양의 건물이 맞닿는 곳에 발길이 드문 나지막한 언덕이 있다. 늦가을, 잔디와 민들레가 초죽음이 된 것이 안쓰러워 폭설이 오면 나는 어김없이 눈삽으로 그 위에 하얗 눈 더미를 만들어 주는 것이 습관이 됐다.
아주 고약한 제초 인부에 잘못 걸려들면 싹둑 잘려나가기도 하지만 작년에는 용하게 피해갔다. 별과 달, 백열등이 어우러진, 밤빛의 향연에 에워 쌓인 모습이 천사의 무덤 같다. 한 모퉁이 눈 더미를 세차게 툭 걷어찼다. 막 장난질 하다 만, 천진난만한 여린 풀잎들의 화들짝한 모습에 나도 덩달아 놀란다. 신기한 듯, 쭈삣거리며 놀란 나를 빤히 쳐다본다. 여름철 한낮 풀잎보다 더 싱그럽다. 민들레, 냉이, 초록 잎들이 양팔을 번쩍 뻗어서 푸른 잔디와 겨우내 놀고 있는 중이다. 한밤에 들킨 것이 화가 난 모양이다. 얼른 두 손으로 언 눈을 한 움큼 덮어 준다. 눈 녹은 촉촉한 손바닥이 되레 따스하다.
나는 시눅 바람을 사랑한다.
그중에서도 삼월의 시눅 밤바람을 좋아한다. 구름과 태평양 바람이 밴쿠버에 비를 흠뻑 뿌리고 로키 산마루를 넘을 때쯤이면 탈수기에 짓이겨 짜인 마른 빨래요 같이 푸석하고 건조한 바람, 주로 밤에 불어온다. 때로는 세찬 바람이 되어 사납기도 하지만 고요한 미풍으로 오시는 날 밤에는 나는 코와 입을 한껏 벌리고 숨을 연신 들락거린다. 삼월의 시눅바람은 비릿한 냄새가 한껏 진해져서 그럴까?머리가 맑아지고 심장에 활력이 생긴다. 때 묻은 허파가 깨끗이 닦였는지 발걸음이 가볍다. 겨우내 짓눌렸던 마음을 씻어내는 치료약이다.
이렇듯 삼월에는 자발적으로 고독(solitude)을 즐긴다. 외로움을 넘어선 고독은 여생을 위한 투자이리라. 소로(Henry David Thoreau)가 외딴곳 오두막에서 3년을 혼자 살며 맛보는 고독과 같은 즐거움을 누리고 있는 것이다. 나만이 간직한 운명의 선율을 연주할 줄 아는 인생이 노년의 덕목 중 하나 일게다.
나는 오늘도 새벽 운동을 하면서 몸의 근육뿐만 아니라 생각의 근육을 키워간다.
봄비가 차락차락 창문을 두들기는 아침이 오면, 나는 얼른 호미를 들고 뒷밭으로 달려가 달래 냉이 민들레를 캐며 생각의 김도 맬 것이다. 그리고 질 좋은 올리브기름에 쓱쓱 비벼 은은한 향들이 온 몸에 촉촉이 스며들 때까지 실컷 먹어 볼 꿈에 한껏 부풀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