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전투
by Reporter | 19.05.05 15:22 | 17,436 hi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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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 김민식 (캘거리 문협)

한국전쟁 가평전투를 기념하는 제68주년 기념식이 4월 27일 오후 1시 캘거리 한인회관에서 캐나다 한국 참전 용사, 한인회 중요 인사, 이사회. 한인회 임원들과 내빈 등,  50여 명이 참석한 가운데 열렸다. 조촐한 모임이지만 매우 뜻깊고 조직적으로 잘 준비된 모임이었다.

"Today, I urge all Canadians to learn more about the Korean War and to articipate in activities being held to honour the veterans"  - Prime Minister Justin Trudeau - 

(오늘 나는 모든 캐나다 사람들이 한국 전쟁에 대해 더 많은 것을 배울 것을 촉구하고, 참전용사들을 기리는 활동에 참가하기를 요청합니다 - 캐나다 총리 저스틴 트루도 -)

최근, 트루도 수상의 연설문에서 밝혔듯이 캐나다 정부, 국민들은 한국전쟁에 참전했던 역사적 사실을 매우 영예롭고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한동안 한국전쟁은 '충돌'이나 '정치적 행동' 등으로  캐나다 교과서에 표기한 탓인지, 국민들의  뇌리에서 점점 멀어가는 듯했으나, 각고의 노력 끝에 2013년 6월, 캐나다 국회에서 '한국전쟁 참전용사'의 날로 제정했다. 

이를 시발적으로 해마다 캐나다 전국, 지방 단위 규모로 기념식을 확대, 진행하고 있는 현상이 매우 다행스럽다.

오타와에 소재한 국립전쟁기념비 공원에는  가평전투를 기념해서 가평의 화강암 대리석으로 만든 기념비석이 세계 제1차, 2차 대전 기념비와 함께 나란히 조성되어있다.

밴쿠버 지역, 에어드리 등 곳곳에 가평군에서 보낸 화강암으로 기념비가 세워지는가 하면 금년에는 가평전투 기념식이 한인단체 등  교민들에 의해 주도하는 기념식도 늘어나고 있다.

6.25전쟁 발발 당시, 캐나다는 세계 제2차 세계 대전을 끝낸 직후라, 평화 분위기로 들떠 있었다. 경제 등 내치에 골몰하고 있었으므로, 연이어 한국 전에 뛰어들 수 없는 형국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50년  6월 30일 개회 중이던 하원의회는 유엔군의 파병을 지지하고 캐나다 군 파병을 신속하게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한국전이 발발한지 일주일이 채 못된 시점이다. 

보병 1개 여단, 3척의 해군 구축함, 공군 수송기 1개 대대, 2만 7천명의 군인을 파견했다.

이는 그 당시 캐나다 군인의 50%- 절반의 병력을 파병했다고 한다. 이 규모는 파병 UN 군 중 미국 영국에 이어 세 번째 큰 규모이다 캐나다 군인 516명이 전사하고 16명은 행방불명이 되고 수많은 부상자가 속출했다. 캐나다 국민들과 장병들에게는 특별한 인연이 없었던 동방의 작은 나라 대한만국을 위해 자원입대하고 전사한 장병들이 한국에 뼈를 묻은 것이다. 우리 교민들은 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을 잊지 않고 기념하며 계승 발전시켜야 한다.

그중에서도 가평전투에 대한 관심이 해마다 늘어 가는 것은, 연아 마틴  상원의원의 각별한 노력이 배어있다. 2013년 연아 마틴 상원의원이 앞장서서 정전협정일인 7월 27일을 '한국전 참전용사의 날'로 지정하는 동시에 <법정 기념일>로 제정했다, 캐나다 한인 교민 역사에 획기적으로 이룬 쾌거이다. 그 중심에 가평전투에서 승전한 역사적 기록이 있다. 

밀고 밀리는 상황 속에서 중공군 춘계공세가 다시 시작됐다.

가평전투는 1951년 4월 23 ~ 25일 3일간 호주, 뉴질랜드, 캐나다의 영국 연방 27 보병 여단이 중공군 20군과 격전을 벌여 밤새 치열한 전투 끝에 진지를 사수하고 퇴각시킨 전투다. 이를 막지 못했으면 경춘 가도가 뚫리고 재 탈환했던 서울이 다시 함락됐을 것이라고 역사가들이 기술하고 있다.

오른쪽  677고지에는 캐나다 프린세스 패트리샤 제2대대 병력 450명이, 왼쪽 고지에는 호주 3대대 병력, 그 사이 계곡 밑으로 뉴질랜드 포병부대가 진을 치고 있었다. 4월 25일, 병력의 40%가 전사를 해 전의를 상실한 호주군이 퇴각을 했다. 20분에 한 번씩 나팔을 불며 인해전술로 참호까지 밀고 올라오는 6,000여 명을 캐나다군 450여 명이 육탄전으로 방어하고 새벽에 중공군을 퇴각시킨 것이다.

밤이 새도록 계속된 방어에 힘이 겨운 캐나다군은 뉴질랜드 포병부대에 전투 위치를 알리고 포격을 요청했다. 참호 안에서 싸우는 자신들보다  엄페물이 없는 인해전술 중공군의 피해가 더 클 것으로 예측했기 때문이다. 무전을 받고 주저하던 포병들이 포격을 시도했고 캐나다군의 작전대로 방어에성공했다. 이날 전투에서 캐나다군 47명 전사하고  99명의 부상자를 냈다. 중공군 전사자는 여러 가지 기록들이 있으나 1,000에서 4,000명으로 추정하고 있다.(출처; Canada, Korean War, Battle of Kapyang)


6.25 전쟁은 1950년 6.25일 새벽 북한군이 선전포고 없이 기습 남침해 불과 3일 만에 서울을 함락 시키고 7월 21일 대전, 7월 23일 광주, 7월 27일 여수 순천을 함락시키는 등 낙동강 이남을 제외한 남한 전 구역이 순식간에 북한 괴뢰군의 수중에 넘어갔던 영원히 잊지 못할 뼈아픈 사건이다.

 

전전 세대인 나는, 이날 기념식에서 애국가를 부를 때 울면서 불렀다. 나의 좌우 옆자리에 함께 서서 제창하던 문숙경 한인회 이사회 부이사장, 노인회 이석철 선생이 의아해하며 어리둥절한 표정이었으나, 계속 눈물이 흐르는 것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오래동안 6.25 전쟁을 망각하고, 가평전투는 더더욱 까마득하게 잊힌 사건으로 생각한 자신이 부끄러워 흘린 참회의 눈물이리라. 

 

'살아있는 우리는 늙어가지만 그들은 늙지 않을 것입니다. 그들을 늘 기억할 것입니다'                                                       - 캐나다 참전용사  추모의 시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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