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려(伴侶) 포니테일 팜
by Reporter | 16.11.23 14:04 | 23,784 hit

청야 김민식(캘거리 문협)

나는 노년기(老年期)의 문턱으로 다가갈수록 진실한 반려, 동반자를 구하는 것은, 강건했던 신체가 어느 날 불현 듯, 생리적으로 모든 기능이 점점 감퇴하는 문턱을 넘어서고 있기 때문일까?

생각과 행동이 쇠퇴해지는 것을 막아 볼 려는 처절한 본능적 자아가 생성되면서, 초조한 마음으로 얼마 남지 않은 여생의 또 다른 반려(伴侶)를 찾아 나선다.

생물과 무생물 사이를 오를락 거리며, 심연의 미세한 것들의 음성과 미풍까지도 관찰하려는 욕구 때문에, 아슬아슬한 긴장의 끈을 놓을 수 없다.지난 것들을 과감히 추려내어 버리고 새로움을 창조하는 일들에 부쩍 몰두하는 것도 노년만이 만끽할 수 있는 즐거움이다.

나는 노년에야 비로소 나의 운명을 긍정적으로 사랑할 줄 아는 방법을 배울 수 있어서, 어쩌면 나의 인생 황금기는 노년일 것 같다. 이 순간, 나는 새벽녘과 저녁녘 하늘에 수놓는 황홀한 생성과 소멸을 거듭하는, 아침놀과 저녁놀을 흠모하고 있다.

반려의 반(伴)은 사람인변(亻)에 절반 짝을 뜻하고, 려(侶)는 사람인변에 성씨 려(呂)가 붙으니 나의 일차적 반려자는 숙명적으로 아내이다. 서로 피할 수 없는 유한한 짧은 인생, 노인 연금을 수령하는 아내나 나는 늘 죽음을 생각한다. 내가 먼저 아내의 죽음을 지켜볼지, 아내가 나의 죽음을 슬퍼할지 알 수 없는 엄숙한 현실에 죽음의 생각 없이는 아름답고 생기로운 여생의 만들 수 없다.

노년 이민자의 죽음은 남다르다.

모든 처절한 역경을 넘은 후에 거룩하게 위엄으로 다가오는 엄연한 실존이기에, 점점 다가오는 죽음 앞의 생명도 찬란하고 엄숙한 생기가 더욱 넘쳐야 한다. 내가 노년에 안일을 피하고 순간의 고통을 사랑하는 이유이다. 삶이 버거울 때, 또 다른 반려자를 찾는 이유다.

현세에서 반려할 친구, 동물, 취미들은 많은 시간과 헌신이 요구된다. 아직도 시간을 쪼개서 힘든 생업을 영위하는 나에게는 힘겨운 생각들이다.

얌체 같은 발상이지만, 힘 안들이고 평안히 같이 대화하며 나의 죽음을 확실히 지켜보면서 생을 찬미해 줄 반려가 없을까? 노년이기에 생각할 수 있는 아름다운 생각이리라

또 다른 반려를 찾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

일상의 희노애락(喜怒哀樂)을 20여 년 간 묵묵히 지켜보며 생의 기를 불어준 반려가 의외로 가까운 곳에서 그런 나를 애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포니데일 팜(Ponytail palm-Beaucarnea recurvata) 이다.

ponytail palm beaucarnea recurvata에 대한 이미지 검색결과

반 다육식물로 호리술병을 닮고 난초 잎과 비슷하다고 해서 덕구리난(德久利蘭)이라고도 한다. 물주기도 겨울철엔 한두 번 정도면 족하고, 여름엔 매월 한번 정도 준다.

여태껏 비료를 준 적이 없어 절반의 분재로 생장했다. 오늘따라 요조숙녀로 보인다. 어깨춤 높이의 긴 몸매가 날씬하다. 아름다운 자태를 무릎높이의 투박한 미루나무 받침대 위에서 미를 뽐내고 있다. 길게 늘어트린 35인치의 수십 개의 머리카락이 길고 긴 허리를 지나 아름다운 둥근 엉덩이(물 저장고)를 살짝 덮고 있었다. SNS에서 수백 개의 포니테일 팜 사진들이 올라오고 있지만 자태가 나의 것을 따라올 수 없다. 숫한 아픔 속에 기적적으로 성장한 생생한 아픔을 경험한 영물(靈物)이기 때문이다.

나와의 인연은 20여 년 전으로 거슬러간다.

매크라우드 트레일 남쪽에 월마트가 처음 개장을 한 그해 추운 겨울, 매장을 거닐다가 말라가는 화분 속의 식물들을 익숙한 동작으로 연신 쓰레기 통으로 버리는 여종업원 너머로, 발아 한지 얼마 안 되는 새끼손가락 크기의 낯선 식물이, 손바닥 절반도 안 되는 얇은 플라스틱 화분에서 잎이 비틀어진 채로 처량한 모습으로 떨고 있지 않은가?

간신히 흥정을 해서 25센트의 가격을 주고 샀다. 집에서 정성껏 자주 물을 주고 보살폈지만 서서히 말라가더니 어느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봄이 되어 화분 정리를 하다가 큰 화분 틈새로 떨어져 파릇하게 자라는 포니테일 팜을 찾은 기쁨의 추억이 있다.

물을 너무 자주 주었기 때문이다. 몇 번의 화분갈이를 하는 사이 큰 손자가 태어나고 화분들의 흙을 뒤엎는 난리가 여러 번 있어 애지중지하던 화분들을 지인들에게 나누어 주었다.

포니테일은 지하실로 피신했는데 몇 달을 건너 물을 주어도 다행스럽게 생장했다.

새집으로 이사를 하는 통에 대궁이 부러져서 또 지하실에 처박아 두었다. 다른 식물은 다 시들어 버렸는데 포니테일만 유일하게 살아남았다.

노년에야 인생의 철이 들어 생존의 의미를 공유한다.

엊그제 밤늦게, 가게에서 50KG의 밀가루 반죽을 들어 올리다 어깨와 허리를 심하게 다쳤다. 소파에서 병원에 갈 준비를 하는데 거실의 포니테일 팜이 말을 걸어온다. “지금 약통에 있는 함량이 강한 근육이완제와 소염진통제를 먹고 한잠 푹 자세요.” 전혀 생각지 못했던 발상이었다. 삶의 지혜가 생성된 것이다. 그 이튿날 나는 기적같이 거뜬히 일어났다.

나무도 목이마르면 비명을 지르고 몸이 잘릴 때는 비명을 지른다. 그 비명이 우리 귀에 들리지 않고 수액이 피로 보이지 않을 뿐이다. (영국 글래스코 대학 맬컴 윌킨스 교수)

그대들은 나무들이 말을 한다는 사실을 아는가? 만일 그대가 나무들의 말에 귀를 기울일 줄 안다면 나무들은 그대에게도 말을 할 것이다. (아메리카 인디언 잠언집 중에서)

수명이 길어 50년 이상 키우는 포니테일 애호가가 다반사다. 유명한 식물학자가 포니테일에 대해서 칼럼을 쓰면 수백 명의 애호가가 연신 댓글을 단다.

이제 겨우 20여년의 인연이지만 그는 나의 여생을 지켜보면서 삶을 독려할 것이고 나는 그에게 삶의 이야기들을 들을 것이다. 세상을 이별하는 날, 그의 이파리라도 꼭 잡고 숨을 거두리라.

나의 집 거실에는 옆집에서 이사 가다 버린 화초들, 작년 12월31일 RONA 화초매장에서 버려진 화초들을 구해다가 지금도 건강하게 잘 키우고 있다. 나의 집은 식물 고아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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