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년전 전국의 소녀 감성을 흔들었던 ‘주근깨 빼빼마른 빨간머리 앤’. ‘예쁘지는 않지만 사랑스러운’ 그녀가 캐나다 태생이란 사실을 아는 이는 드물다. 1908년 캐나다 여류작가 루시 모드 몽고메리에 의해 소설로 창조된 그녀는 ‘알프스소녀 하이디’(스위스), ‘말괄량이 삐삐’(스웨덴), ‘소공녀 세라’(영국)보다 더 많은 소녀팬을 거느렸던 추억 속 스타다. TV에 주근깨 소녀가 나올 시간이면 고무줄 타던 꼬마소녀들이 일순 골목에서 사라질 정도였다. 작품 배경이 된 캐나다 프린스 에드워드 섬에는 지금도 소녀 감성을 간직한 아줌마팬들이 몰려와 눈물을 쏟고 간다니 캐나다가 선물한 감수성의 깊이는 나이아가라 폭포 못지 않으리라.
2010년 2월 26일 캐나다 벤쿠버 퍼시픽콜리세움 경기장. 한국인 소녀가 캐나다에 환희와 감동의 선물을 안겼다. 캐나다 국민을 비롯해 전 세계인이 지켜보는 가운데 한국의 김연아는 피겨 스케이팅 역사에 최고의 연기로 남을 무대를 선보였다. 여신의 환상적인 몸짓에 캐나다는 매료됐고, 이날의 주인공 옆에는 자국 출신 코치 브라이언 오서도 서 있었다.
역사를 거슬러 가보면 캐나다는 우리에게 많은 도움을 준 고마운 존재다. 120년 전 고종황제 주치의와 제중원 원장을 지내며 한국인 최초의 의사를 키워낸 인물이 캐나다인 에비슨 박사였고, 국내 최초의 중수로 원전인 월성원전 건설에 전폭적인 기술 지원을 아끼지 않은 나라도 캐나다였다.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가 인정하는 의료·원전기술을 갖게 된 배경에는 이처럼 캐나다의 도움이 컸다.
6·25전쟁때는 미국ㆍ영국에 이어 세번째로 많은 2만6000여명을 파병해 312명이 사망하고 1212명이 부상당하며 우리나라를 지켰다. 1963년 수교 이후 1993년 ‘특별동반자관계’를 구축하는 등 한반도를 포함한 아·태 지역의 평화유지에도 노력을 아끼지 않고 있는 우방이다.
이런 양국이 23일 한·캐나다 FTA에 공식 서명하며 상호 외교사에 기록될 메가톤급 선물보따리를 주고 받았다. 따지고 보면 지난날 양국의 경제교류는 경제규모와 협력관계에 비해 미미한 수준이었다. 세계 10위와 15위의 경제규모를 자랑하는 캐나다와 한국의 교역규모(‘13년 기준)는 경제규모가 작은 싱가포르(37위, 326억 달러)와 대만(25위, 303억 달러)에 훨씬 미치지 못하는 99억 달러에 불과하다. 이마저도 2011년 115억 달러, 2012년 100억 달러 등 매년 감소하고 있는 추세다.
이번 FTA는 이처럼 멀어가는 양국의 협력관계를 일거에 반전시키는 계기다. 그리고 우리는 또다시 캐나다로부터 선물을 받게 됐다. 캐나다의 자동차 수입관세가 2년 뒤에는 완전 철폐돼 경쟁국인 일본·EU보다 유리한 위치에 서는 등 수출기업들이 볼 혜택은 상당할 것이다. 무엇보다 고무적인 것은 석유 매장량 세계 3위, 석유 생산량 6위, 천연가스 생산량 4위, 우라늄 생산량 3위 등 캐나다의 풍부한 지하자원을 십분 활용해 우리경제를 업그레이드 시킬 동력원으로 삼을 수 있다는 점이다.
캐나다 역시 경제규모가 17억 달러 늘어나고 한국으로의 수출이 32% 증가할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또한 아시아지역 첫 FTA 파트너로 한국을 택해 미국·멕시코 등 북미지역에 편중(65%)된 무역구조에서 벗어나 아시아·유럽 등 해외시장 다변화의 교두보로 활용하겠다는 의욕을 보이고 있다.
한국의 12번째 FTA 친구가 된 캐나다에서 우리는 또다른 ‘빨간머리 앤’을 찾아내야 한다. 세계 2위의 광활한 국토 만큼 자원ㆍ에너지ㆍ문화 등의 분야에서 찾아낼 소재는 무궁무진하다. 작년초 디지털 기술을 입혀 국내에서 재개봉한 빨간머리 앤의 홍보용 포스터에는 작품속 그녀의 명대사가 다음과 같이 적혀 있다. “생각지도 못한 멋진 일들이 지금 일어나고 있어요”. 벤쿠버의 김연아 점프까지 연상되며, 캐나다와의 FTA는 우리에게 희망과 기대감을 갖게 하는 기분좋은 사건임이 분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