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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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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단상

글쓴이 : Reporter 날짜 : 2017-09-05 (화) 17:23 조회 : 17157
글주소 : http://cakonet.com/b/column-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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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 김민식 (캘거리 문인협회)


가을은 천고마비(天高馬肥)의 계절,

읊조리기만 해도 마음은 으레 어릴 적 고향마을로 달려간다.

토박이 농민들의 넓은 집 뜰에는, 감나무 대추나무 열매가 벌그레 주렁주렁 탐욕스럽게 열리고, 앞산의 밤나무 밭에는, 아람이 무르익어 떨어질 무렵이면, 네 갈레로 쭉 터진 밤송이에서 알밤이 방실거린다.

넓디넓은 황금들판에서 세찬 물결이 이는 늦가을,

학교 수업이 없는 날 새벽이면, 나는 괜스레 바빠진다. 자루를 울러 메고 행여나 먼저 온 사람이 주워갈세라, 대추나무 밤나무 있는 곳을 향해 냅다 뛴다. 밤사이 울타리 밖으로 떨어진 낙과를 주워 담기만 해도, 금세 한 자루 가득 찬다. 참기름으로 갓 닦아낸 것처럼, 알밤과 대추에서 갈색 윤기가 반들거린다. 언젠가는 마을 종갓집 노인이,울타리 밖에서 알밤을 줍던 나를 힐끗 보시더니, 마당 안에 떨어진 굵은 알밤들만 골라 연신 밖으로 던지며 말을 건넨다. “너거 집 제사상 차릴라 그러제” 지금 생각하니 마당의 큼직한 햇밤으로 베푸는 진실공덕(眞實功德)을 실천하시고 있었다.

내친김에 누렇게 익은 들녘의 논으로 향한다. 갓 낫질해서 눕혀 놓은 듯, 싱싱한 볏 짚 사이를 이리저리 훑으면, 아침 이슬을 머금고 파르르 떠는, 메뚜기들이 지천에 널려있다. 한 병 가득히 채워오면, 어머니는 들기름에 연신 들들 볶아 건네준다. 하얀 사기종발 위로 피워내는 메뚜기 향기가, 부엌 어간(於間)을 가득 채운다. 그 향기가 얼마나 진했던지, 지금 생각만 해도 코끝이 간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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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은 순 우리말, ‘갓(끊)다’의 어원을 지니고, ‘가실하다’(추수하다)가 ‘가슬’로 불리고 가을이 됐다. 미국은 fall, 영국은 autumn으로 불린다. fall은 영국의 16세기 중반autumn의 동의어로, 'fall of the leaf'로 사용되다가 실용주의 미국에서는 ‘fall’로 간결해지고 전통을 중시하는 영국에서는 ‘autumn’으로 정착했다고 한다.

이렇듯 가을의 의미는, 다 자란 식물을 잘라내고, 낙엽 떨어지듯 떨어뜨려내는 계절이다. 가을은 한해의 것을 거둬들이고 떨어내는 계절이지만, 야생동물 들에게는 혹독한 추위를 이겨내기 위해서 미리 준비하는 계절이다. 먹이를 저장하는가 하면, 털들이 더욱 조밀하게 자라고, 철새들은 따뜻한 곳으로 죽음을 무릅쓴 이동을 감행한다.

가을이 오고 있다.

아직도 더위가 가시지 않지만, 밤이 되자 밤바람이 차다.

가게 뒷마당의 이태리 포플러 나무에서, 노란 낙엽이 백열등을 타고 쪼르르 뛰어 내린다. 산들바람에 신바람이 났나보다.

나는 아직도 심신이 지쳐있어 머리가 맑지 못하다.

어정쩡하게 보낸 여름 탓인지 지금 발만 동동 굴리고 있는 것이다. 가을은 여름과 겨울처럼 강열한 기운을 품는 계절이 아니라, 강산이 노란빛으로 물드는, 잠시 스쳐가는 담백한 계절로 위안을 받곤 했는데, 지금 온 몸으로 가을을 맞을 준비가 안 돼 있다. 총총한 별빛, 큰 쟁반만한 달빛, 아스펜 나무숲 사이들 스치는 고즈넉한 가을 정취는커녕, 인근 지역에서 계속 덮치는 산불 연기 때문인가? 쾌쾌하고 탁한 공기를 연신 들이 마시니, 마치 서울의 한 복판에 서 있는 것 같다.

이 가을에 정신을 바짝 차리고 지친 몸을 추슬러야만 긴긴 겨울을 보낼 수 있다.

아침 일찍 인근의 Fish Creek Park 깊숙한 계곡의 개울물을 찾았다. 마치 강물에 발을 담구고 영혼을 정화시키는 인도사람들처럼, 발을 담근다. 발이 시리 오며 정신을 깨운다. 큰 가뭄인데도 아직도 곳곳에 작은 계곡물이 솟아 흐른다. 그들은 만나고 또 만나고 합쳐져서 큰 물줄기를 만든다. 아하! 계곡 물이 사는 법이 이것이구나.

노년이란, 젊은 시절처럼 많이 보는 것이 아니라, 깊이 보는 것이다.

오랜 역경과 실패를 딛고 일어서는 세월의 경험으로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것, 그것이 노인의 자랑이고 자산이리라.

‘이 또한 지나가리라’ 옛 잠언처럼, 나는 인생의 긴 터널 속을 지나가는 나그네이지, 동굴 속 주인은 아니기 때문에, 이 가을에 지친 영혼을 맑고 깨끗하게 닦아 내며, 겸허한 마음으로 가을을 맞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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