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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아버지

글쓴이 : Reporter 날짜 : 2017-05-31 (수) 16:28 조회 : 18852
글주소 : http://cakonet.com/b/column-1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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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야 김민식(캘거리 문협)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 일 때마다, 아버지는 무슨 사업을 해도 실패하셨던 분이라는 것 이외에는 별다른 기억이 없다.

지금에야 이 잘못된 생각들이 매우 후회스러워 아버지에게 송구스러울 뿐이다.

아버지는 동네 면서기로, 어머니는 반찬가게를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지낸 사실을 같은 동네에 함께 살았던 지인을 통해 훗날 그 사실을 알았지만, 피난시절의 충격 때문인지 나에게 늘 과묵했고 무표정이셨다.

원산 항구로 동정을 살필 겸 구경을 나왔다가, 무일푼으로 12월 마지막 피난 상선을 타고 떠났던 피난민 시절, 졸지에 당한 슬픔을 딛고 국제시장에서 앉은뱅이 노점상을 하셨다. 길 가운데 늘어진 점포 하나를 얻어서 미군 PX물품 장사를 하셨고 밀수품도 팔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얼마 후 모든 것을 접고는 집 인근에 양계장, 양돈장 사업을 하기도 하셨다. 그것도 닭이 질병에 한꺼번에 죽어 페기처분 하는 둥, 오래 가지 못했다.

내가 초등학교 6학년 시절, 추운 겨울 늦은 밤 친구 집에서 공부하고 집에 도착하니,

집 밖에서 어머니와 심한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어머니의 성경책을 마구 찢고 있었고, 나를 보자 다툼은 얼른 중단됐으나, 놀라서 배고픔도 잊은 채 건너 방으로 얼른 들어갔다. 부모님의 이런 모습을 처음 보았기 때문이다. 긴 일자형 건너 방에는 누이와 여동생 그리고 남동생이 나란히 누워 자고 있었다. 나의 잠자리는 구석 모퉁이였는데 늘 그랬던 것처럼 부엌에서 혼자 주린 배를 채우고 잠자리 구석 모퉁이에 놓인 나의 앉은뱅이책상에서 늦은 밤이라 전구는 켜지 못하고 석유 호롱불을 켜고 밀린 공부를 마주하곤 했다. 친구의 집은 30여분의 먼 거리에 비록 판잣집이지만, 따로 공부방이 마련되어 있어서 이따금씩 방과 후에 달려가 같이 공부하던 곳이었다. 분노가 치밀어 그날은 옷 입은 채로 잠을 자고 이튿날 정자우물에서 얼음을 깨고 물배를 채운 후 학교에 일찍 등교했다. 누이동생이 도시락을 가져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나는 같은 날 시험을 치루는 전기(前期)전형에 경남 중학교 보다 한 등급 낮은 대신중학교를 지원, 합격했다. “잘했어, 장하다.” 내게 처음 칭찬하시는 말씀이었던 것 같다. 시골 초등학교라 200여 졸업생 중 고작 10여명 내외의 학생이 전기 시험에 합격했기 때문이다.

1학년 교실에 처음 들어서니 담임선생은 영어과목 선생이었고 몇몇 학급아이들은 담임과 이미 친숙해 있었다. 입학하기 전 미리 영어 과외공부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후에야 알았는데 변두리 시골학생인 나는 이 사실을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너의 입학등록금을 겨우 마련했어.” 부산여고를 졸업한 손위 누이가 일러주었다.

“지금은 선생님이 임시 반장을 지명하고 두 달 후에 반장 선거를 한다. 매달 월말고사를 치루고 전 학년 10등 이내는 월사금 전액면제를 받는다.” 이 말들도 아직 또렷하게 기억한다.

방과 후 얼마동안 학교 교실에서 홀로 수제와 예습 복습을 하고 집에 도착하면 땅거미가 지곤 했는데, 하루는 아버지가 집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지금은 옛 동아대학교 농과대학부지가 대형 아파트 단지로 변모해 흔적을 찾을 수가 없지만 지금의 역사 깊은 ‘괴정정자우물’ 부근이다.

집 담벼락에 붙여서 흙벽돌로 작은 공부방을 지어주셨다. 남쪽과 서쪽에 큼직한 유리 창문을 달았고 지붕은 함석 철판을 얹었다. 내부는 도배지로 말끔히 단장 되었다. 책상은 비록 중고 같았지만 깨끗했다. 전기는 연결이 되지 않아 늘 호롱불로 공부했으나 공부방이 너무 좋아 담요로 몸을 둘둘 말고 맨 마룻바닥에서 잠을 청하기 일쑤였다. 공부방 덕분에 1. 2. 3학년 연속 학교 반장을 했고 3학년 때는 학생회(재건학생회) 회장을 했다. 공부도 매월 전 학년 10등 이내에 든 달이 대부분이었다. 중학교 시절 월사금(月謝金)을 낸 기억이 없다. 간간히 등수 안에 들지 못해도 독지가들이 대신 납부해 주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도 그 많은 월말고사 상장과 임명장 삼년 개근상장을 고스란히 보관하고 있다.

가끔 삶에 의욕을 잃을 때 그것들을 꺼내보고 삶을 용기를 얻곤 한다.

밤이면 반딧불들이 창가를 현란하게 수놓고 휘영청 달빛이 스며든다. 함석판 지붕을 두드려대는 요란한 빗줄기가 졸음을 깨운다. 한밤중 아버지가 팔다 남은 초콜릿과 고래 고기, 깨소금 한 접시를 밤참으로 슬며시 들여 놓아 주곤 하셨다.

부산 고등학교에 입학을 했다. 그 해에는 ‘부산시연합입학고사’에서 부산고등학교가 166점, 경남고등학교가 163점, 3점 차이에 300여명이 있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었다. 2살 터울의 여동생은 부산 여중에 재학 중이었으니 그 시절, 괴정 시골에서 유일하게 형제들이 나란히 일류학교를 다니는 남부럽지 않은 가정이었다.

몇 개월이 지날 어느 날 나만 남겨두고 모두 강원도 산골기도원로 호연히 집단 이주를 했다. 나는 담임선생이 소개해준 부잣집에 가정교사로 졸업 때까지 지낼 수 있었지만, 그 원인을 아무도 나에게 알려 주지 않았다. 생전에 어머니께서 아내에게 설명했던 것을 최근에야 내게 일러 주었다. 밀수품을 취급하다 며칠 유치장에 다녀온 후, 교회 권사인 어머니가 용납할 수 없었으리라.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는 생전에 황량한 들판에서 홀로 강하게 살아가는 방법을 가르쳐 주셨다. 내가 이제야 인생의 철이 들어, 형제들과 조카들이 남부럽지 않은 행복한 생활을 하고 있는 것은, 부모님이 주신 절절한 염원의 은혜라고 생각하니 가슴이 메어진다.

지난달 한인합창단 정기 연주회 중, 남성합창단의 ‘아버지’중창을 부르면서 아버지에 대한 그리움이 솟구쳐 한 동안 입만 벌리고 노래했다.

‘한 걸음도 다가 설 수 없었던,.......서로 미워도 하고, 누구보다 아껴주던 그대가 보고 싶다. 가까이에 있어도 다가서지 못했던,......... 가슴 속 깊은 곳에 담아두기만 했던, .......긴 시간이 지나도 말하지 못했었던, 그래 내가 사랑했었다’

‘고요한 바다로 저 천국 향할 때 주 내게 순풍주시니 참 감사합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 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 아버지가 가정예배 시간에 즐겨 부르시던 찬송가 503장을 불러 보나 눈물만 흐르니 더 이상 부를 수가 없다.

나의 사랑하는 아버지!

부디 꿈속에서라도 다시 찾아 오셔서 ‘마음속의 공부방’ 하나를 더 만들어 주시면, 갈수록 연약해지는 자신을 추슬러 강하게 살겠습니다. 죽는 날까지 아버지처럼 부지런히 살겠습니다. 생전에 그러셨던 것처럼 그것으로 족합니다. 그것이 저에게는 큰 은혜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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