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 김민식(캘거리 문협)
오늘은 12월 마지막 주일 아침,
인생의 산등성마루에 서 있습니다. 앞으로 한 발짝만 더 내디디면 하산 길로 접어드는, 해가 바뀌는 길목입니다.
왠지 식은땀이 줄줄 흐를 것 같아 하산이 두려워집니다. 될 수만 있으면 오래 머물며 쉬고 싶습니다.
혼자서 조용히 머물며 생각의 김을 매고 싶습니다.
이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감고 두 손 깍지를 모아 책상위에 겸손하게 머리를 숙이고 기도를 하고 싶습니다.
단순한 침묵의 기도, 초라한 모습이지만, 지난날의 회상과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간간이 가난한 마음을 간절히 소원합니다.― 심령의 가난함을 구하는 기도도 아니고 여생의 행복을 비는 기도는 더더욱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을 향해 가난한 마음을 갈구하는 기도입니다.
어떻게 이 험준한 산을 타고 올라왔는지, 산을 오르는 동안 쉬엄쉬엄 오른 기억은 별
로 없습니다. 오직 아득한 등성만 쳐다보고 오르느라 기진맥진했지만,
산등성마루에서 건강한 호흡을 할 수 있다는 이 순간, 감사 밖에는 더 구할 염치도,
여유도 없습니다.
조목조목 다른 것들을 소원하는 기도는 나에겐 오직 사치일 뿐입니다.
남들은 쉬이 오르는 것만 같아 보이지만, 나에게는 기적과 같은 고난의 행군이라,
잔잔한 기적이고 은혜임에 틀림없습니다.
일제 해방 다음해,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전전세대로,
만주에서 태어났습니다. 아장걸음으로 피난민 부모, 가족을 따라 추운 겨울, 원산에서 마지막 미군 철수 상선을 타고 부산에 내렸습니다. 내일 배가 떠날 것이라는 소식에 가족들이 인근 부두에 구경나왔다가, 어머니가 소지한 성경책을 번쩍 든, 가족을 본 미군이 우리 가족이 서있던 줄까지만 태우고 수많은 원산 시민을 뒤로한 채, 우리 가족은 짐도 없이 떠난 절박한 삶의 출발 선상, 그렇게 삶의 등정이 시작되었습니다.
금년에 한국의 어느 지상파 TV에서 그 미군의 손자가 출연해 그 당시 성경책을 뻔쩍 든 아주머니 가족을 찾는다는 소식을 본 지인이 사연을 전해왔습니다.
수소문 끝에 미국의 기념 사업회와 연락이 닿았습니다.
대청동 산 중턱 땅굴 방공호에 문짝을 달고 가난의 삶을 시작한 기억이 오늘 따라 유난히 생생합니다. 나는 그때 언젠가 고열로 온 몸이 불덩어리인체 땅굴 제일 깊숙한 곳에 누워있었습니다. 아마 사경을 헤맨 것 같습니다. 캄캄한 밤에, 손등으로 큰 구렁이가 지나가는 것을 비몽사몽간에 보았습니다. 그리고 이튿날 아침 거뜬히 일어날 수 있었습니다. 지금도 그 구렁이가 내 온 몸을 휘감으며 열을 식혀주고 잃어가는 의식을 깨우며 밤새 지켜주었다고 믿고 싶습니다.
이것은 때때로 나의 삶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그림자(상텐)로 나의 무의식 세계에서 늘 존재하며 삶의 질곡에서 방황할 때마다 용기를 주곤 했습니다.
그렇게 맨 몸으로 인생의 등반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부모님을 따라 초등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국제시장 양키골목에서 미군PX물품을 책가방에 넣고, 어깨에 메고, 이 가게 저 가게 운반해 주는 운반책으로 일했던 오랜 기억이 새롭습니다. 다른 운반책은 잠복한 미군 헌병에 적발되곤 했지만 나만 용하게 빠져나오곤 했습니다.
그리고 캘거리 이민 생활 20여 성상,
오늘은 가슴이 설렌 채 감사의 기도를 드리고 싶습니다. 이렇게 가슴이 설렌 적은 없었습니다. ‘인생 칠십 고래희’ ― 백세시대를 외치는 오늘날, 옛날 고어처럼 이미 퇴색되어 빛바랜 낱말이지만, 아직도 일을 할 수 있다는 나의 설렘은 고통과 고난을 통과한 후에 오는 기쁨이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마음 밭에서 싹틔워 열매 맺는 열정의 산물이라는 것을 깨닫는 아침, 여타의 복들이 있다면 ‘덤’으로 따라오는 축복이기에 송구영신주간의 기도는 그저 단순히 감격에 넘친 감사기도일 뿐입니다.
해마다 늘 그랬듯이, 새해아침 미명, 인근 민둥산 로키산맥 언저리에서 홀로 묵상하며 기다리다가 주님의 일출을 맞겠습니다. 이번에 일출을 보개 되면 두 손을 뻔쩍 들고 감사의 눈물을 마음껏 쏟다가 엉엉 울어도 보겠습니다.
그리고 기쁨으로 삶의 하산을 시작하겠습니다.
주님, 새해아침엔
벌판에 선 나그네의 가난한 가슴에 따사한
빛으로 오셔서 사랑의 씨앗 또 심어주소서
풍성한마음, 하루하루 삶, 밑줄을 스스로 긋게 하시고
하산하는 걸음마다 늘 죽음을 생각하며
황혼녘 구름들, 풀 한 포기 생명까지도 사랑하며
인사의 말을 건네게 하소서
언젠가 보우강물 타고 바다로 가면
그땐 출렁출렁 춤추며 한껏 노닐게 하소서
[이 게시물은 운영자님에 의해 2015-12-31 01:16:04 교민뉴스에서 이동 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