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머니를 사임당과 비교해서 만든 영상으로 불효자에게 사모곡의 눈물을 흘리게 하신 분에게 감사를 드리며 이 글을 올립니다. 9삭의 저를 간직하시고 3개월의 문상객을 접대하시며 여자의 삼종지도만 지키시며 그 고행의 삶을 영위하시다가 떠나신 우리 어머니, 80순을 넘긴 이 유복자의 눈물을 어디에 쏟아내어야 할지요. 이 영상을 들으시는 독자분들에게 이 불효한 유복자의 사모곡을 보냅니다. 부끄럽지만 목이 메이고 눈물이 마른 인생길을 공유코자 이 창에 올려 봅니다.
아버지의 아호는 사성제 혹은 순부라 불렀음이 아버지의 유고집에 기록이 되어 전해 오고 있습니다. 그 시절 59세의 연세로 고혈압으로 갑자기 소천을 하셨다 합니다. 한 평생 아버지의 사랑을 모르면서 살아오면서 남들이 아버지 이야기를 하면 숨어서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음을 아신다면 아버지 어머니를 가지신 분들에게 더욱 효도하시기를 간곡히 앙청을 드려 본답니다.
이 영상에서 저의 원 고향을 영주로 표현했지만 제가 출생 한 곳은 봉화읍 도촌 1리 <사제>였음을 밝혀 둡니다. 그 곳에 도계서원이 있었고 세조가 조카인 단종을 쫓아내고 권력을 찬탈하니 저의 가계가 크게 번창했음으로 저의 선친이 사제라는 향리로 돌아가 종손이 끊어짐에 따라 종손으로 양자를 드셨답니다.
이에 세조의 부도덕함에 격분한 금성대원군. 이 보흠. 이 수형 등 조상님들이 세조를 축출코자 반정을 꾀하다가 세조에게 발각 극형을 당했다 합니다. 다만 이 수형 조상님만 그의 생애를 유랑을 하며 단종을 그리다가 세상을 뜨시니 사기에는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기록하고 있다 합니다. 세조를 축출코자 반정을 도모하시던 분들은 조정의 명에 의하며 제사도 올리지 못하였으나 광해군 때 이 부당함에 격분 저의 향리 사제에 불천위로 제사를 모시라는 명에 의하여 지금까지 이분들의 충효사상을 그리는 사당을 짓고 위폐를 모시고 제사를 모시고 있습니다.
저의 이야기로 아버지를 보지 못했고 아버지 그리며 살아온 이 유복자가 어머니를 그리는 사모곡을 불러보며 뿌리의 졸작에 의미를 부여해 주신 모든 독자 분들에게 순애의 고결한 감사의 마음을 드리며 간략한 저의 졸견의 말씀을 드렸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모든 독자분들의 건승과 빛나는 삶을 영위하시기를 기원드리며 끝을 맺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