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 이 유식 시인의 인생길 산책 98<샤를 보들레르의 영광과 고통의 생애>
1821년에 출생 1867년 세상을 떠난 프랑스의 시인 <보들레르>, 그의 시집 <악의 꽃>은 1857년 출간된 작품으로 전 세계에서 명성을 휘날리고 있다. 200여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그 생명을 잃지 않고 있는 이 시집은 세계인이 열광하며 읽혀지고 있지만 시인 자신은 그 영광을 누리지 못하며 살았었다.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세계 사람들에게 각인되어 있으면서도 그의 가족들의 모의로 금치산자라는 선고로 비참한 생애를 마친 시인이다.
즉 그의 삶은 <잔느 뒤발>이라는 혼혈 창녀를 사랑했기 때문에 치욕적인 고통 속에 한 생을 영위한 불행을 감수해야만 했다, 그 사랑이란 것이 무엇인지 다시한번 상기하며 <아카페>의 사랑을 하지 못했슴이 못내 아쉬움으로 남아 있다, 그 사랑 때문에 아편과 대마초에 빠지게 되였지만 뒤발 때문에 그의 문학은 인공낙원을 만들어 주었슴은 참 아름다운 결실이라는 생각이다.
나의 안타까움은 뒤발이 보들레르의 사랑을 순수하게 받아들이지 않고 그가 진정으로 자기를 사랑하고 있슴을 간파한 후에도 직업적으로 돈만 뜯어간 배신의 사랑을 했다는 것에 분노를 느끼게 한다. 뒤발은 그의 죽음을 잉태시켰고 그에게 성병까지 안겨주어 그의 생애를 망친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러나 다른 일면은 뒤발로 인하여 보들레르는 심미적 상징주의적 시를 썼기에 사후에 세계적 명시인의 영광 속에 19,20세기를 환호케하고 있으며 그의 시는 21세기에도 사랑을 받고 있다. 사랑도 이런 사랑이라면 한번쯤 해 봄직하지 않을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뒤발은 어떤 매혹적인 아름다움을 소유한 여인이였기에 보들레르를 그렇게 훌륭한 작가로 탄생시켰을까를 상상하며 쓴 웃음을 짓는다.
지면상 내가 좋아하는 보들레르의 시 한편을 소개하며 끝을 맺을까 한다.
그의 시 <송장 앞> 5연의 시를 김 인환이 번역한 것을 여기에 남겨본다.
내 넋이여,회상해 보라, 우리가 본 것을/ 그처럼 따스하고 화창한 여름날 아침에/오솔길 모퉁이 자갈 깔린 자리에 뻗은/끔찍스럽게 썩은 시체를/ 일연의 시다
음탕한 여자처럼 두 다리를 쳐들고/뜨거운 몸은 독기를 뿜어내고/썩은 냄새 진동하는 복통을/태연하고 뻔뻔스레 내 벌리고 있었지/ 이연의 시다
삼연은 생략하고 사연에서, 하늘은 그 희한한 해골을 바라보고 있었다/피어나는 한 송이 꽃을 보듯이/고약한 냄새 하도 지독해/
당신은 하마터면 풀 위에서 기절할 뻔했지/파리 떼가 그 썩은 복통 위에서 윙윙거리고/ 오연까지의 작품을 여기서 줄이며 나 혼자 상상에 잠겨본다.
이 시가 그의 악의 꽃의 대표시라면 너무나 관념적 새디즘에 흐르며 생존의 허무인 것 같은데 어이 독자들이 환호를 할까 하는 생각이다. 즉 이 시는 우리같은 범인이 소화할 수 없는 작품임에는 틀림이 없는 것 같다. 이 시의 뜻은 극에 달하는 아름다움을 가진자나 위대한 생존을 영위한 사람도 이 세상을 떠나면 짐승의 시체와 다를바가 없기에 죽은자라 해도 경시하거나 추함으로 잊는 것 보다 추악과 선의 미,지옥과 낙원이 따로 있을까를 연상케한다.
간단히 그의 생애를 더듬어보면 아들을 너무나 사랑했던 아버지가 그가 여섯살 때 먼길을 떠나자 말할 수 없는 상처를 입게됨은 당연했으리라. 하늘같은 아버지 그 아버지도 하늘같이 그를 보호하고 사랑했건만 아버지의 죽음은 그의 생애를 슬픔에 잠기게 했다. 그 때 삼십대에 미망인이된 그의 어머니가 재혼을 하게되자 절망감은 상상을 초월하게 된다. 나는 여기서 사람은 정상적인 양친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각인해 보며 결론을 맺는다. 죽은자는 말이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