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초 이 유식 시인의 인생길 산책 68
<민족의 영원한 자랑 나의 친구 김 종국 회장, 중>
"베푼다는 것보다 인간에게 아름다운 미덕은 없을 것이다. 이 말은 인간이 할 수 있는 덕목 중 첫째로 꼽는 것이 대가 없는 희생으로 남에게 베풂을 주는 것이리라. 즉 베풂은 인간의 본능에서 우러 나오는 소유욕을 가지지 않는다는 무소유의 의미를 내포 하고 있다.
소유하지 않고 베풂에서 찾는 행복 ,이 얼마나 값진 일인가?
자기 가정의 몇 백년이 된 유물을 민족(民族)을 위하여 우리의 후손 들을 위하여 기꺼히 희사한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이 바로 괴헌 고택 가보를 국가에 기증한 나의 친구 김 종국 회장이다. 이 얼마나 자랑스러운 일인가. 나는 항시 생각을 한다. 내가 못하는 일을 하는 사람은 나의 친구가 아닌 어느 누구라 해도 항시 존경스럽게 생각을 하며 살아왔다.
나의 고향 영주시 순흥면 소수서원 선비촌에 가면 김 회장이 국가에 기증을 한 보물이 국보로 전시가 되어 있다.
소수 서원의 건립 유래를 보면 1542년(중종 37) 풍기군수(豊基郡守) 주세붕이 풍기 지방의 교화를 위해 이곳 출신으로 성리학을 우리나라에 처음 도입한 유학자 안향(安珦)의 사우(祠宇)를 세웠다가, 이듬해 1543년(중종 38) 사우(祠宇) 앞에 향교 건물을 옮겨다 재실을 마련하여 선비들의 배움터로 삼음으로써, 서원의 대체적인 골격이 이루어졌다.
이어 한양의 종갓집에서 안향의 영정을 옮겨와 봉안하고서 처음으로 이름을 '백운동 서당'(白雲洞 書堂)이라고 하였다. 이후 1545년(인종 원년) 에 안축(安軸)과 안보(安補)의 영정도 함께 배향하면서 백운동 서원(白雲洞 書院)이라 부르게 되었다.
소수서원은 국보 111호로 지정되어 있으며 소수 박물관은 사적 55호로 정해져 있고 여기에는 안향의 영정이 걸려 있다.
그후 1549년(명종 4) 퇴계 이 황이 풍기 군수로 부임해 와서 서원의 격을 높이고자 송(宋) 시대의 예를 언급하며 국가에서 서원에 대한 합법적인 인정과 정책적인 지원을 해줄 것을 당시 경상도 관찰사 심 통원에게 요청, 1550년(명종 5)어전회의에서 좌의정 심연원(심통원의 친형)의 주청으로 마침내 당시의 국왕이었던 명종은 친필로 소수 서원(紹修書院)이라 사액(賜額)을 내리고, 아울러 《사서오경》과 《성리대전》등의 서적, 노비도 하사했다. '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져버린 교학을 다시 이어 닦게 했다(旣廢之學 紹而修之)"는 데서 온 말이었다.
소수서원의 역사적인 관점은 대략 이정도에서 마치며 김 회장이 기증을 한 그의 몇백년이 된 가보(家寶)가 전시된 건물은 하기와 같다. 이 건물 밖 현관에는 괴헌 고택의 기증품 전시관이란 현판이 붙어 있다.
행여 이 글을 읽는 독자분들이 있다면 이 소수서원 선비촌 박물관과 천여년 이상을 영속하는 부석사를 꼭 방문하여 우리 조상님들이 남겨놓은 전통문화의 유산을 꼭 관람하라고 건의를 해본다.